written by NAL
202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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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항복 후 갈루스가 제정을 택한단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알리샤가 말을 꺼냈다. 공간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레오스 공화국, 우리의 조국을 복속시킨 갈루스 제국은 우리나라에도 제국을 선포하여 그 체제 하에 사람들을 두려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고위 공무원들은 이미 제국의 편에 야합했습니다. 폭력과 압제가 두려운 민중도 제국에 협력할 것입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우리만이, 행로를 결정할 수 있겠지요.”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옷이 미끄러지는 사락, 소리가 들렸고, 꽤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일어나서 손을 가만히 들어올렸다.
“네, 블레이 변호사님. 말씀하시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행로라는 것엔 몇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까?” 마치 변론처럼, 블레이라 불린 사람은 낭랑하고 귀에 꽂히는 목소리로, 그러나 차분하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푸른 머리의 엘프, 피델리 라 로셸 고문이었다.
“두 가지입니다. 제국의 편에 겉으로라도 서서 합법적으로 정치활동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지하조직화되어 탄압받더라도 공화주의를 계속 밀고 나가느냐.”
“그리고 공화주의 뿐만이 아니라 레오스 공화국이라는 정체성도 밀고 나가야겠죠. 지하조직화 한다면 근처의 리브리안이나 알드 룬의 저항군과 힘을 합칠 수도 있습니다.” 알리샤 헤르 대사가 이어서 말했다.
“답변 감사합니다. 어려운 문제군요.”
“그래서 여러분을 모은 겁니다. 지금부터 의견을 자유롭게 말씀해 주십시오.”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 시간동안 쉬지 않고 의견을 주고받은 그들은 아직도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그들의 신념과 직결된 문제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신념을 밀고나가기 위해 불법을 택하느냐, 신념이 힘에 의해 스러지는것보단 합법을 추구하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느냐. 변호사 블레이의 말처럼,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붉은 머리의 청년은 잠시 논쟁이 사그라들은 틈에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어느 한 쪽을 택할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상은 공화정에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민이 공화정을 잊지 않도록 지하에서라도 공화주의를 퍼뜨리고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것 못지 않게 지금의 인민이 살아가는 실제 생활도 중요합니다. 공화정을 포기하고 제정에 타협해서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법과 정책을 관철해야 합니다. 인민의 힘을 보존해야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겁니다. 혁명은 단순히 체제가 무너졌다고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인민의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맞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리, 아니, 에오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계속 일하면 되겠군요. 다만 합법활동과 지하활동 간의 연계는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최종 목적을 잊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분열하면 안 되는거죠. 제가 말한 게 의도한 방향이 맞나요, 에오스?”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마지막으로 경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동의하십니까?”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람도 있고,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푹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에오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이제 갈라질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을,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짐작하였다. 그러던 와중,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알바로입니다. 그렇다면… 헤르 씨와 로셸 씨는 어느 편으로 서실 겁니까? 저는 합법 활동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만, 두 분의 선택도 궁금합니다. 사실상 저희 모임의 리더역이나 마찬가지셨으니까요.”
“이제 그 이름은 잊어주십시오. 알리샤 헤르와 피델리 라 로셸은 이제 없습니다. 에오스 히에칼과 헤스 히에칼, 그렇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델리, 아니, 헤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에오스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하조직 쪽을 택할 생각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 공간은 당황스러움이 깃든 웅성임으로 가득 찼다. 여기서 에오스 씨만큼 말재주가 좋고 비전이 있는 사람이 없다, 무술에 능하신 건 알지만 지하조직의 무력저항에 직접 나서시는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등의 걱정하는 의견들이 속속 터져나왔다. 몇몇은 고위 공직자까지 올라갔던데다가 상관의 부패를 폭로하고 그로 인해 지지를 얻었던 경험을 통해서 의정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런 의견들을 듣던 에오스는 가만히 미소짓고는, 대답했다.
“정당의 고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고 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께서 부족한 저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게 어려운 길이라 걱정해 주시지만, 전 오히려 제가 더 쉬운 길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께 어려운 역할을 떠맡기는 것이죠. 원래의 이상을 숨기고 때로는 더러운 타협까지 불사해야 하는, 그 와중에 인민을 위한 실질적 법 제도의 성과까지 내야 하는 일입니다. 황제에게 협력하는 치욕까지 견뎌야 하는, 정말 큰 용기를 내는 겁니다. 저는 그럴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무력저항을 하는 편이 좋겠지요.”
“저는 에오스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갈루스의 제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과 황제가 주장하는 힘을 통한 인류의 통합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 제가 가진 능력이 지하조직 전장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와 같은 노선을 타는 분들만이 알게 되겠지요.”
“자, 이제 각자 마음을 정하셨겠지요. 합법활동을 하실 분들은 나가셔서 자유롭게 논의하십시오. 지하활동을 하실 분들은 여기 남아서 저희와 함께 조직화 방안을 논의합시다. 그리고 앞으로도 꾸준히 연락을 하겠지만… 여기서 나가시는 분들은 이제… 여기 있는 이들을 잊으셔야 합니다. 저 역시도 잊어 주십시오. 아까 헤스 씨가 말했듯, 우리는 이제 헤르 외교관과 로셸 외교고문이 아니라 에오스 히에칼과 헤스 히에칼이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헤르 대사로서, 여러분께 앞으로의 행로의 큰 행운을 바랍니다.”
여기 있는 이들을 잊으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에오스의 얼굴이 잠깐 찡그려지는 듯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반절 정도의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슬픔? 고통? 무엇 때문이었을까. 뜻을 함께해온 동지들과 갈라지는 자리. 슬픈 자리였다. 그러나 그 표정이 일그러진 사람들 전원, 머지않아 차분하고 안정된 얼굴로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서로에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헤르 대사와 로셸 고문에게 악수와 포옹을 하였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악수하고, 껴안고, 등을 두드리고, 몇몇은 훌쩍이기도 하며 깊은 감정을 나눈 후, 나갈 자들은 문 앞으로, 남기로 결정한 적잖은 수의 자들은 에오스 쪽으로 갈라섰다. 마지막으로 진하게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은 사람들 중, 문 앞의 사람들이 천천히 방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방에서 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짐짓 무거웠다. 또각, 또각, 뚜벅, 뚜벅, 하는 소리가 방 밖으로부터 울리고, 그 소리들이 고요해졌을 즈음, 멍하니 문을 바라보는 동지들을 둘러보던 에오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다시 회의를 시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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