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내가 하필 24일에 발목을 다쳤기 때문이다. 그치만 다행히 골절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고, 보호대를 한 채 서울로 향했다.
26일 점심시간쯤 종각역에서 모였다. 내가 보호대 탓에 걸음이 느리고 계단을 이용할때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두 분이 이해해주셔서 잘 다녔다. 우선 점심부터 먹었다. 역 근처의 딩딤? 이라는 곳에서 딤섬을 먹었다. 가격대는 좀 셌지만 맛있었기에 만족한다. 논님은 전날 티알을 한 거에 여전히 과몰입해 계셨어서 그 얘기를 많이 했다.
점심을 먹은 후엔 근처 카페에 갔다. 사실 계획을 잡을 때 카페에서 4시간을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가능한 일이었다ㅋㅋㅋㅋ
날논실 셋이서 찍은 만년필 떼샷. 서로 만년필 구경도 하고, 써보기도 하고, 서로를 위해 준비한 편지와 선물도 여기서 나누었다. 숙소에 가서 조금 더 이것저것 만지며 이야기해 보기로 하며 평온한 한 해를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온한 한 해나 피아스코같이 뭔가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룰에 약한 편인데도, 두 분과 정말 즐겁게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설정덕후들이 모여서 평한해를 하니 별 설정이 다 나오더라. 유능한 한 명의 지도자 아래에서 돌아가는 부족사회, 인간 중심적인 산업화된 사회, 그리고 그를 침략하는 외부세력, 신화생물, UFO, 바벨탑, 화산 등의 자연재해...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고 즐거웠다. 평한해를 하고서 논실님의 자작 세계관인 종말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그것 역시 재미있었다. 설정 글을 읽고 나만의 그 세계관 캐릭터를 구상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4시간이 금방 갔다.
그 다음 일정은 인사동 모나미 잉크랩에 가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논님이 인간 네비게이션이셨던 덕에(ㅋㅋㅋㅋ) 길을 헤메지 않고 바로 잘 찾아갔다. 잉크랩에서는 예정대로 잉크 조색 체험을 했다.
나만의 잉크만들기 표를 보고 원하는 색조합을 정한 다음, 비커에 잉크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가며 비율을 조정하고 원하는 색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나는 내 드림주 테마의 잉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원하는 색 계열을 확실히 정해갔기 때문에, 비교적 빠르게 내가 원하는 색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근데 잉크랩에서 시필용으로 제공하는 종이가 별로 질이 안 좋은 일반지인지, 잉크를 조금만 많이 올려도 잉크가 뒤에 배기고 번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따로 들고간 어프로치 노트 프로에 잉크를 시필하며 내가 원하는 색을 찾아갔다. 만약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잉크랩에 갈 때 자신이 평소에 쓰는, 잉크를 잘 견디는 노트나 종이를 하나 들고가길 권한다. 나의 경우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테가 뜨는 잉크를 만들었는데 모나미 잉크랩 종이에서는 테가 보이지 않았고 내가 따로 들고간 시필지와 노트에서 테가 뜨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잉크의 이름은 '여명의 필경사'. 아까도 말했듯 드림주 테마다. 이명에 맞게 새벽하늘 색을 구현하고 싶었는데, 집에 와서 이로시주쿠 심해와 세일러 시키오리 시모요와 비교해보고 내가 원하는 색이 제대로 구현되었음을 확인했다. 지금도 펜입해서 쓰고 있는데, 정말 마음에 든다. 드림주 외관이 적발적안인데 이는 적테로 구현이 되어서 꽤나 뿌듯하다. 이명과 겉모습이 좀 이질적인 캐릭터인데 테를 통해 두 가지가 모두 구현된 잉크가 만들어져서... 마음에 들어서 계속 쓰고 있다.
논님과 실님은 각각 '제비꽃 설탕 절임'과 '태양의 황제'를 만드셨다. 두 분의 자캐페어 캐릭터들의 별명이다. 제비꽃 설탕 절임(이하 제설절)은 여리여리한 파랑과 보라의 사이 색깔, 태양의 황제(이하 태제)는 황금빛 노란색 잉크였다. 제설절의 경우에는 논님이 여리한 색깔을 만들기 위해 베이스를 11방울이나 넣으셨다. 내 어프로치 노트에서는 번지지 않았는데, 모나미 잉크 자체가 원래 좀 묽고 베이스를 많이 넣으셨으니 보통 종이에는 못 쓰실 것 같은 잉크가 되었다ㅠㅠ 조만간 좋은 노트를 한 권 사셔야 할 것 같았다. 태제는 갈색 색분리가 있는 태양빛 잉크인데, 노란 잉크 치고 가독성도 굉장히 좋은 잉크가 나왔다. 약간 글입다공방의 '별빛이 나린 언덕' 잉크에서 펄을 뺀 버전같은 색이 나왔는데, 이것도 예뻤다.
잉크랩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홍대의 '이입(@2ep2ep)'이라는 레즈/바이 only 술집이었다. 여성 서사 영화들을 소재로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우리가 마신 건 영화 <아가씨> 컨셉의 '사쿠라'였는데, 사케와 체리브랜디 베이스의 칵테일이었다. 상큼한 체리의 맛이 깔끔한 사케와 어우러져 가볍고 산뜻한 맛을 냈다. 그리고 안주 겸 저녁식사로는 파스타 두 종류와 소시지플래터를 시켰다. 전부 맛있었다. 보드마카? 비슷한 걸로 컵 꾸미기도 할 수 있었는데 두 분은 컵에 오너캐도 그려넣고 캐릭터 이명도 써넣고 하시며 열심히 꾸미셨다. 나는 딱히 꾸미지 않았다. 안주도 술도 맛있었지만 나는 그리 많은 양을 마시지는 않았다. 이입 입구에 계단이 굉장히 많고 가파르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호대를 한 상태였고 자칫 계단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술이 맛있었지만 두 잔 정도 마시고 마는 정도로 절제를 했다. 술의 한 80%는 실님이 마시신 것 같다. 논님은 원래 알코올을 잘 못 마신다고 하셨고. 이입에서 술을 마실 때까지 이전의 일정 때문에 다소 피곤했는데 술을 마시니까 오히려 잠이 깼다는 사실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두 분과 수다떠는것도 즐거웠고. 그렇게 식사시간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홍대 L7 호텔이었다. 3인 방을 썼는데, 방은 꽤나 좁았다. 그리 개방감이 있는 구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방에 들어와서 다들 잠옷으로 갈아입고, 본격적으로 잉크와 캐릭터 덕질을 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후회를 했다. 딥펜 들고 올 걸. 만년필만 몇 자루 챙겨오고 딥펜을 안 들고왔는데 두 분이 딥펜으로 잉크 신나게 써보시는 거 지켜보며 나도 딥펜 ㅠㅠ 하고 있었다. 두 분이 서로의 글씨를 신기해하며 딥펜 바꿔써보시는 걸 지켜보는게 재미있었다! 서로 어떻게 글씨를 이렇게 작게/크게 써요? 어떻게 이렇게 곡선을 넣어요? 이러시면서 신기해하시는데 그게 너무 귀엽기도 하고 웃겼다ㅋㅋㅋㅋ 논님의 잉크 제설절이 워낙 묽어서 잘 마르질 않아... 오너먼트 닙을 사용해 제설절로 그린 무지의 눈이 계속 빛난다는게 너무 웃겼다. 무지 눈에서 빔 나오는데요? 이러면서 깔깔 웃고 그랬다. 한참 잉크덕질을 하고, 논님과 실님은 서로에게 종말 달력과 쯔무쯔무 인형을 주고받으셨다. 서로의 앤캐에게 애정이 가득하다는 게 느껴져서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실님의 와씨디(Y욕망에 C찬 D대가리)한 웃음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웃겼다!ㅋㅋㅋㅋㅋ 두 분 모두 욕망에 찬 이야기를 하시는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래도 그런 쪽에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없는 편이니까. 남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잘 듣는 편이기에, 즐겁게 욕망이 가득한(ㅋㅋㅋㅋ)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뒤엔 피아스코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피곤하기도 했고 알콜+벤조의 힘으로 슬슬 기억이 삭제될 때가 되어가고 있어서 피아스코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예측은 맞았다. 피아스코를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지금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미있었다는 느낌은 기억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두 분이 피아스코하시는 동안 난 트위터를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두 분이 술을 사러 편의점으로 나가셨을 때 나는 혼자 방에서 잘 채비를 마쳤다. 논실님이 돌아오셔서 조명 하나를 끄신 걸 마지막으로 내 기억은 완전히 끊겨있다. 그 다음에는 잠들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다 갔다.
다음날 아침, 내가 먼저 일찍 일어났다. 당연하다. 제일 일찍 잤다. 두 분은 주무시고 계신 동안 나는 혼자 씻고 나왔다. 아침에 두 분이 일어나고 나서 여쭤보니 새벽 4시까지 이야기하다 주무셨다고 해서 놀랐다. 나는 최근에 제일 늦게 잔 게 2시 정도였어서... 그 시간까지 썰풀이하시면서 목이 쉬지는 않으셨을지. 뭐 즐거우셨던 것 같으니 그걸로 된 듯하다. 여튼, 아침에 일어나서도 자캐랑 티알 얘기를 즐겁게 하다가 11시 반쯤 체크아웃했다. 그러고 아침 겸 점심으로 할랄 푸드를 먹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고 맛있었다. 할랄 푸드로 점심을 해결하며 우리끼리 지금 우리는 여행을 하는 중인데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공항에서 외국 음식을 먹는 중이다, 라는 상황이라고 가정하고 가상 여행을 하는 상상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홍대 소품공장에 들렀다. 라이레이 20cm인형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이런저런 예쁜 옷이 많았는데, 난 체크 치마와 와이셔츠, 그리고 빨간색 한복 세트를 샀다. 생각했던 것보단 옷이 비싸지 않았다. 그러고 포토존에서 논실님의 쯔무쯔무 인형들 사진도 많이 찍고, 내 라이레이 인형 사진도 여럿 찍어뒀다. 굉장히 귀여웠다...
소품공장에 갔다와서 나는 곧장 집으로 가는 버스로 향했다. 두 분은 카페에서 조금 더 이야기 나누시다 헤어지신 듯했다.
집에 와서 논님이 주신 편지도 읽어보고, 주신 레진공예품들도 자세히 보고, 라이레이 인형에게 옷도 입혀보고 하며 계속 즐거워했다. 두 분과 만난 덕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만날 땐 꼭 노래방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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